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네 데카르트 (문단 편집) === 장미십자회와 위트레흐트 논쟁 ===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유흥을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학문에 푹빠지게 되자, 친구들은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 회원일 것이라 어림짐작을 했다. 당시 수학,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비밀결사 단체의 회원이라는 소문이 프랑스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는 실제로도 그 단체에 가입하고 싶어했다. 데카르트는 장미십자회 회원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데카르트는 훗날 장미십자회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한다. 1637년까지도 장미십자회 회원이라는 소문에 시달리던 데카르트는 거듭하여 이 혐의를 반박했다. 『방법서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머릿수만큼의 개혁자가 있었다." 개혁자를 반대한다는 것을 돌려서 말하는 대목인데, 이것은 장미십자회와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한 의도였다. 또한 장미십자회와의 관계를 의식한 듯 '어리석은 짓거리'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방법서설』의 1부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의 뜻을 꽤 분명히 표현한다. >그리고 끝으로, 나는 그릇된 여러 학설에 대해 이미 그 정체를 잘 알고 있어서 연금술사의 약속에도, 점성술사의 에언에도, 마술사의 속임수에도, 또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떠들어 대는 어느 누구의 잔꾀나 허풍에도 더 이상 속지 않게 되었다. 당시 연금술사, 점성술사, 마술사는 [[장미십자회]]를 가리키는 말로 통했었다. 1647년에는 이와 관련해서 지독한 사상논쟁(위트레흐트 논쟁)에 휘말린다. 이는 그가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그의 철학이 유럽의 각 대학에서 정식과목으로 채택되어 낡은 신념을 고수하는 세력들의 반감을 사게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트레흐트 대학교|위트레흐트 대학]] 학장인 보에티우스는, 데카르트를 당시 잘 알려진 장미십자회 회원들과 엮으면서 데카르트가 무신론자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또한 데카르트에 관한 강의를 금지하고, 제자의 이름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반박하는 팸플릿을 돌렸다. 논란이 커지자, 장미십자회 회원임을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유명인이었던 데카르트의 이름을 팔고선 자기네 조직의 적법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당시 무신론자는 화형에 처했기 때문에,[*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바니니라는 남자가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데카르트는 무신론자라는 공격에 한편으로는 겁을 먹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데카르트는 보에티우스에게 공식 사과편지를 보내 이 논란을 무마시켰지만, 그는 이미 이 부질없는 싸움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데카르트가 네델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현대의 데카르트 전공학자들은 데카르트와 장미십자회의 관련성을 의심하고 있다. 2001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에두아르 멜은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의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도 데카르트가 쓰는 많은 용어가 장미십자회가 쓰는 용어와 겹친다. 장미십자회는 자신들만의 암호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심적 흥분(enthusiasm)', '놀라운 학문(admirable science)', '위대한 발견(marvelous discovery)' 같은 표현들은 정확히 당시에 장미십자회 회원들이 암호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난로 방에서 꾼 꿈들과 장미십장회 철학 사이에도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데카르트는 꿈에서 '예, 그리고 아니오'라는 시를 보는데, 이는 장미십자회 철학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